맨위로가기

발터 보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발터 보테는 독일의 물리학자로서, 1914년 막스 플랑크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포로 생활을 겪었다. 그는 한스 가이거와 함께 입자 입사각 결정 방법을 개발하고 콤프턴 효과를 연구하는 등, 일치법을 활용한 연구를 수행하여 산란 현상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한, 우주선 연구를 통해 고에너지 입자의 존재를 밝히고, 중성자 발견에 기여했으며, 1943년 독일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을 완성했다. 1941년 흑연의 중성자 감속 효과에 대한 연구에서 오류를 범하여 독일의 핵 개발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보테는 막스 플랑크 메달과 195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뛰어난 화가이자 음악가이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 하이델베르크 천문대
    하이델베르크 천문대는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위치한 국립 천문대로, 1774년 설립되어 성운 조사와 소행성 탐색을 주로 연구했으며, 800개 이상의 소행성을 발견했다.
  • 독일의 대학 교수 -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알려진 19세기 독일 철학자이자, 도덕, 종교, 형이상학 비판, '힘에의 의지', '위버멘쉬', '영원회귀' 등의 개념 제시로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독일의 대학 교수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과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하여 양자역학 확립에 크게 기여한 독일의 이론물리학자로,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 계획에 참여했으나 전후 독일 과학 연구 발전에 기여했으며 193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 막스 플랑크 메달 수상자 - 난부 요이치로
    난부 요이치로는 일본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이며, 양자색역학, 끈 이론, 자발 대칭 깨짐 등 입자물리학 분야에 기여하여 200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 막스 플랑크 메달 수상자 - 피터 디바이
    피터 디바이는 분자 구조 및 물질의 물리적 성질 연구에 기여한 네덜란드 출신의 물리화학자로, 노벨 화학상 수상, 데바이 단위, 데바이 모델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나치 독일 시대 행적 논란 후 미국으로 이민하여 연구를 지속하며 현대 화학 및 물리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발터 보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0년대 발터 보테
1950년대 발터 보테
이름발터 보테
원어 이름Walther Bothe
로마자 표기Balteo Bote
출생1891년 1월 8일
출생지오라니엔부르크, 독일 제국
사망1957년 2월 8일
사망지하이델베르크, 서독
국적독일
학문 분야
분야물리학, 수학, 화학
모교훔볼트 대학교 베를린
박사 지도교수막스 플랑크
직장훔볼트 대학교 베를린
기센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막스 플랑크 의학 연구소
주요 업적보테-가이거 동시 계수 실험
동시 계수법
동시 계수 회로
수상
수상노벨 물리학상(1954년)
막스 플랑크 메달(1953년)
푸르 르 메리트 과학 예술 훈장(1952년)
기타
배우자바르바라 벨로
서명

2. 생애

발터 보테는 오라니엔부르크에서 태어나 훔볼트 베를린 대학교에서 막스 플랑크에게 배워 학위를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러시아군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5년간 생활했다. 종전 후 베를린 물리기술연구소에서 한스 가이거와 함께 여러 개의 가이거 계수관을 사용하여 입자를 동시에 측정하고, 그 신호의 차이로부터 입자의 입사각을 결정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 장치를 사용하여 콤프턴 효과를 연구했으며, 이러한 일치법(coincidence method)은 산란 현상의 현대적인 연구 수단의 선구자가 되었다.

1920년대에는 우주선 연구를 수행하여 우주선에 감마선뿐만 아니라 고에너지 입자(메존)가 포함되어 있음을 보였다. 1927년에는 알파선 충돌에 의한 경원소의 핵 변환 연구에 일치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알파선을 베릴륨에 충돌시킨 베릴륨에서 높은 에너지의 새로운 방사선이 발생하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나중에 제임스 채드윅에 의해 중성자임이 확인되었다.

보테는 1929년부터 훔볼트 베를린 대학교 조교수, 1930년부터 기센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겸 주임을 지냈고, 1932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물리학과 학과장이 되었다. 카이저 빌헬름 학술진흥협회 의학연구소에서 연구를 시작했고, 1934년 막스 플랑크 의학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1941년 보테와 페터 옌젠은 흑연의 중성자 감속재 효과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고했지만, 이 결과에 오류가 있었던 것이 밝혀지면서 독일의 핵 개발은 감속재로 중수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는 독일의 핵 개발이 지연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1943년 보테는 독일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을 완성했다. 종전 후에도 하이델베르크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연구했다. 1953년 막스 플랑크 메달을 수상했고, 195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발터 보테는 프리드리히 보테와 샬로테 하르퉁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8년부터 1912년까지 훔볼트-베를린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13년에는 막스 플랑크의 조교가 되었고 1914년 플랑크의 지도하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3][4]

2. 2. 연구 경력

발터 보테는 핵물리학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며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1930년 기센 대학교 물리학과장으로 부임한 보테는 헤르베르트 베커와 함께 폴로늄에서 방출된 알파 입자베릴륨, 붕소, 리튬에 충돌시켜 투과성이 강한 방사선을 발견했다.[11] 1932년 제임스 채드윅은 이 방사선이 중성자임을 밝혀냈다.[3][4][5]

1941년 보테는 페터 옌젠과 함께 흑연의 중성자 감속 효과를 연구했으나, 실험 결과에 오류가 있어 독일의 핵 개발 과정에서 중수를 감속재로 선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3년에는 독일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을 완성했다.

다음은 보테가 우라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핵물리학 연구 보고서''에 발표한 보고서 목록이다.

발표일제목
1940년 6월 7일탄소에서 열중성자에 대한 확산 길이
1940년 6월 28일유한 우라늄 기계의 치수
1941년 7월 17일반사층이 있는 기계의 치수
1940년 5월 9일우라늄에서 핵분열 중성자의 에너지
1941년 3월 28일우라늄과 감속재의 몇 가지 특성. 연구에 대한 종합 보고서
1941년 1월 20일확산 측정을 통한 열중성자에 대한 38[34]의 반응 단면적
1940년 3월 8일우라늄 표면에서의 공명 포획
1941년 5월 26일38 산화물과 물의 혼합물에 대한 측정; 증배 계수 K와 공명 포획 w
1941년 7월 11일고속 및 저속 중성자에서 38의 중성자 증배 및 38 금속과 물에서의 확산 길이
1941년 1월 20일전기석에서 열중성자의 흡수
1941년 5월 12일우라늄 표면에서의 공명 포획
1941년 4월 28일물과 38 시료의 층상 배열을 이용한 실험
1941년 10월 10일베릴륨에서 열중성자의 흡수와 고속 중성자의 증배
1941년 12월 7일고속 중성자에 의한 핵분열을 이용한 기계
1943년 6월 29일강철 방호벽에 대하여
1943년 5월 5일핵물리학의 연구 수단
1943년 12월 6일U와 D2O 두께 변화를 통한 층상 실험
1945년 1월 3일1.5톤의 D2O와 U 그리고 40cm 탄소 후방산란층을 이용한 실험에 대한 보고서

[32][33]

2. 2. 1. 초기 연구 활동 (1920년대)

보테는 1913년 물리기술연구소(Physikalisch-Technische Reichsanstalt, PTR)에 합류하여 1930년까지 근무했다.[3][4][5][6] 1912년 한스 가이거가 그곳의 새로운 방사능 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보테는 PTR에서 1913년부터 1920년까지 가이거의 조수로, 1920년부터 1927년까지 가이거 연구팀의 과학자로, 그리고 1927년부터 1930년까지 가이거의 후임으로 방사능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3][4][5][6]

1914년 5월, 보테는 독일 기병대에 자원 입대했으나,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혀 5년간 러시아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러시아어를 배우고 박사 과정 연구와 관련된 이론 물리학 문제를 연구했다. 그는 1920년 러시아인 신부와 함께 독일로 돌아왔다.[5]

러시아에서 돌아온 후, 보테는 PTR의 한스 가이거 밑에서 방사능 연구소에서 계속 근무했다. 1924년, 보테는 보테-가이거 우연 일치 실험(Bothe–Geiger coincidence experiment)을 통해 컴프턴 효과와 빛의 파동-입자 이중성을 연구한 우연 일치 방법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일치법(coincidence method)은 산란 현상의 현대적인 연구 수단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보테의 우연 일치 방법과 그 응용은 그에게 1954년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주었다.[6][7][8][9]

1925년, 보테는 PTR에 재직 중 베를린 대학교에서 사강사(Privatdozent)가 되었는데, 이는 그가 하빌리타치온을 완료했음을 의미하며, 1929년에는 그곳에서 준교수(ausserordentlicher Professor)가 되었다.[3][4]

1927년, 보테는 알파 입자로 가벼운 원소들을 충격하여 원소 변환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28년 H. Fränz와 하인츠 포제와의 공동 연구에서 보테와 Fränz는 핵 상호 작용의 반응 생성물을 핵 에너지 준위와 연관시켰다.[5][6][9]

1929년, 보테는 PTR에 있는 그의 연구소를 방문한 베르너 콜허스터와 브루노 로시와 공동으로 우주선 연구를 시작했다.[10] 우주선 연구는 보테가 일생 동안 계속한 연구 분야였으며,[6][9] 1920년대에는 우주선 연구를 수행하여 우주선에 감마선뿐만 아니라 고에너지 입자(메존)가 포함되어 있음을 보였다.

2. 2. 2. 기센 및 하이델베르크 시절 (1930년대)

1932년 보테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물리 및 방사선 연구소 소장으로 필리프 레나르트의 뒤를 이었다. 루돌프 플라이슈만은 보테의 조교가 되었다.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되면서 독일 물리학이라는 개념이 유행하였다. 이는 반유대주의적이며, 양자역학, 원자 및 핵물리학을 포함한 현대 물리학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대학 환경에서 정치적 요소가 학문적 능력보다 우선시되었다.[12] "독일 물리학"의 가장 저명한 지지자들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필리프 레나르트[13]요하네스 슈타르크[14]였다.

필리프 레나르트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4년 레나르트는 보테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물리 및 방사선 연구소 소장직에서 해임되도록 조치했다. 그 결과 보테는 최근 사망한 카를 W. 하우저를 대신하여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의학 연구소(KWImF, 현재 막스 플랑크 의학 연구소)의 물리 연구소 소장이 될 수 있었다. KWImF 소장 루돌프 폰 크렐과 카이저 빌헬름 학회(KWG, 현재 막스 플랑크 학회) 회장 막스 플랑크는 보테의 이민 가능성을 막기 위해 그에게 소장직을 제안했다.

보테는 1957년 사망할 때까지 KWImF의 물리 연구소 소장직을 유지했다. KWImF에 있으면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명예 교수직을 역임했으며, 1946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루돌프 플라이슈만은 1941년까지 보테와 함께 일했다. 보테는 볼프강 겐트너(1936~1945), 제임스 프랑크에게 박사 학위를 받았고 로베르트 포흘과 게오르크 요스의 추천을 받은 하인츠 마이어-라이프니츠(1936~?), 아놀드 플라머스펠트(1939~1941)를 포함한 과학자들을 직원으로 모집했다. 페터 옌센과 에르빈 휜퍼도 그의 직원이었다.[3][4][5][15][16][17][18]

1938년 보테와 볼프강 겐트너는 핵 광전 효과의 에너지 의존성에 대해 발표했다. 이는 핵 흡수 스펙트럼이 누적적이고 연속적이라는 최초의 명확한 증거였으며, 이 효과는 쌍극자 거대 핵 공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10년 후 J. 한스 D. 옌센, 헬무트 슈타인베델, 페터 옌센, 마이클 골드하버, 에드워드 텔러 등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이론적으로 설명되었다.[5]

1938년 하인츠 마이어-라이프니츠는 윌슨 안개상자를 제작했다. 보테, 볼프강 겐트너, 하인츠 마이어-라이프니츠는 안개상자 영상을 사용하여 1940년에 산란 입자를 식별하는 표준 참고 자료가 된 "전형적인 안개상자 영상 아틀라스(Atlas of Typical Cloud Chamber Images)"를 발표했다.[5][9]

2. 2. 3. 사이클로트론 개발과 우라늄 프로젝트 (1940년대)

1937년 말, 발터 보테와 볼프강 겐트너는 반데그라프 발전기의 성공적인 제작 및 활용에 힘입어 사이클로트론 건설을 추진했다. 11월에 카이저 빌헬름 학회(현재의 막스 플랑크 학회)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독일 연구센터 헬름홀츠 연합, 바덴 문화부, I.G. Farben 등 여러 기관으로부터 자금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1938년 9월 지멘스에 자석을 주문했으나,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기간 동안 겐트너는 업그레이드된 반데그라프 발전기를 이용하여 핵 광전 효과를 연구했다.[19]

겐트너는 사이클로트론 건설을 가속화하기 위해 1938년 말부터 1939년까지 로렌스 버클리 국립 연구소에 파견되어 에밀리오 세그레, 도널드 쿡시와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19]

1940년 여름 프랑스와 독일 간 휴전 이후, 보테와 겐트너는 파리에 건설된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의 사이클로트론을 검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0년 9월 겐트너는 사이클로트론 가동 그룹을 구성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헤르만 댄저가 참여했다. 겐트너는 파리에서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폴 랑주뱅을 석방시켰다. 1941/1942년 겨울, 사이클로트론은 7MeV 중양성자 빔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우라늄토륨이 조사되었고, 부산물은 오토 한에게 보내졌다. 1942년 중반, 볼프강 리즐러가 겐트너의 후임이 되었다.[19][20][21]

1941년, 보테는 사이클로트론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모두 확보했다. 1943년 3월 자석이 납품되었고, 12월에 최초의 중양성자 빔이 방출되었다. 1944년 6월 2일 사이클로트론 준공식이 열렸다. 보테의 사이클로트론은 독일에서 최초로 가동된 사이클로트론이었다.[4][19]

독일 핵에너지 계획(우라늄 클럽)은 1939년 봄 독일 제국 교육부 산하 제국 연구 위원회의 후원으로 시작되었다. 9월 1일 육군 병기국이 계획을 장악했고, 9월 16일 첫 회의가 열렸다. 보테, 지그프리트 플뤼게, 한스 가이거, 오토 한 등이 초대되었다. 두 번째 회의에는 클라우스 클루지우스, 로베르트 되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이 참석했다. 보테를 중심으로 볼프강 겐트너, 아놀드 플라머스펠트 등이 우라늄 클럽 연구에 참여했다. 연구 결과는 핵물리학 연구 보고서에 발표되었다.

우라늄 클럽에서 보테와 그의 직원들은 원자 상수의 실험적 결정, 핵분열 파편의 에너지 분포 및 핵 단면적을 연구했다. 흑연에서 중성자 흡수에 대한 보테의 잘못된 실험 결과는 독일이 중수중성자 감속재로 선호하는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값은 너무 높았는데, 이는 흑연 조각 사이 공기 중 질소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그러나 실험 장치에는 물에 잠긴 지멘스 전기 흑연 구체가 포함되어 공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고속 중성자 단면적의 오류는 지멘스 제품의 불순물 때문이었다. 어떤 경우든, 그들은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반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직원이나 그룹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빌헬름 한레가 이끄는 괴팅겐의 별도 그룹이 보테의 오류 원인을 밝혀냈다.

1941년 말, 핵에너지 계획이 단기간에 전쟁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1942년 7월 우라늄 클럽에 대한 통제는 RFR에 넘겨졌다. 핵에너지 계획은 '크리그스비히티히'(전쟁에 중요함) 지정을 유지했고 군사 지원금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우라늄중수 생산,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및 우라늄 기계(원자로)라는 주요 영역으로 분할되었다. 이 계획은 9개 연구소로 분할되었으며, 보테의 물리학 연구소는 그 중 하나였다. 다른 8개 연구소는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의 물리화학 연구소, 고토우에 있는 HWA 페어주흐슈텔레(시험장), 카이저 빌헬름 화학 연구소, 함부르크 대학교의 물리화학과,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 괴팅겐 대학교의 제2 실험물리학 연구소, 아우어게젤샤프트, 빈 대학교의 제2 물리학 연구소였다.

다음은 ''우라늄 프로젝트''의 내부 간행물인 ''핵물리학 연구 보고서''에 발표된 보테의 보고서들이다.

발표일제목
1940년 6월 7일탄소에서 열중성자에 대한 확산 길이
1940년 6월 28일유한 우라늄 기계의 치수
1941년 7월 17일반사층이 있는 기계의 치수
1940년 5월 9일우라늄에서 핵분열 중성자의 에너지
1941년 3월 28일우라늄과 감속재의 몇 가지 특성. 연구에 대한 종합 보고서
1941년 1월 20일확산 측정을 통한 열중성자에 대한 38[34]의 반응 단면적
1940년 3월 8일우라늄 표면에서의 공명 포획
1941년 5월 26일38 산화물과 물의 혼합물에 대한 측정; 증배 계수 K와 공명 포획 w
1941년 7월 11일고속 및 저속 중성자에서 38의 중성자 증배 및 38 금속과 물에서의 확산 길이
1941년 1월 20일전기석에서 열중성자의 흡수
1941년 5월 12일우라늄 표면에서의 공명 포획
1941년 4월 28일물과 38 시료의 층상 배열을 이용한 실험
1941년 10월 10일베릴륨에서 열중성자의 흡수와 고속 중성자의 증배
1941년 12월 7일고속 중성자에 의한 핵분열을 이용한 기계
1943년 6월 29일강철 방호벽에 대하여
1943년 5월 5일핵물리학의 연구 수단
1943년 12월 6일U와 D2O 두께 변화를 통한 층상 실험
1945년 1월 3일1.5톤의 D2O와 U 그리고 40cm 탄소 후방산란층을 이용한 실험에 대한 보고서

[32][33]

2. 3. 전후 활동 (1946-1957)

1946년부터 1957년까지 보테는 카이저 빌헬름 의학 연구소 (KWImF)의 직책과 더불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정교수(ordentlicher Professor)직을 역임했다.[3][4]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연합군은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사이클로트론을 압수했다. 1949년에 이 장치에 대한 통제권이 보테에게 반환되었다.[3]

1956년과 1957년에 보테는 독일 원자력 위원회(DAtK, Deutsche Atomkomission)의 제2위원회 "연구 및 성장"(Fachkommission II "Forschung und Nachwuchs") 산하 핵물리 연구 그룹(Arbeitskreis Kernphysik)의 일원이었다.

1956년과 1957년 핵물리 연구 그룹 구성원[30]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의장)한스 코퍼만 (부의장)프리츠 보프볼프강 겐트너오토 하젤빌리발트 옌츠케하인즈 마이어-라이브니츠요제프 마타우흐볼프강 리즐러빌헬름 발처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볼프강 파울 또한 1957년에 그룹의 일원이었다.[30]

1957년 말, 겐트너는 막스 플랑크 협회(MPG, Max-Planck Gesellschaft, 카이저 빌헬름 협회의 후신) 회장인 오토 한과 MPG 상원과 새로운 연구소 설립에 대한 협상을 진행했다. 기본적으로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막스 플랑크 의학 연구소의 발터 보테의 물리학 연구소(Institut für Physik)가 분리되어 MPG의 정식 연구소가 될 예정이었다. 진행 결정은 1958년 5월에 이루어졌다. 겐트너는 10월 1일에 막스 플랑크 핵물리학 연구소(MPIK, Max Planck Institute for Nuclear Physics) 소장으로 임명되었고,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정교수(ordentlicher Professor)직도 맡았다. 보테는 그해 2월 사망했기 때문에 MPIK의 최종 설립을 보지 못했다.[19][31]

보테는 독일 애국자였으며, 우라늄 프로젝트(Uranverein)에서의 자신의 연구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치의 독일 정책에 대한 보테의 불만은 그를 게슈타포의 의심과 조사 대상으로 만들었다.[5]

3. 수상 및 영예

수상 및 영예


참조

[1] 웹사이트 The Nobel Prize in Physics 1954 https://www.nobelpri[...]
[2] 백과사전 Britannica
[3] 문서 Hentschel, Appendix F
[4] 서적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Quantum Theory. Volume 1 Part 2 The Quantum Theory of Planck, Einstein, Bohr and Sommerfeld 1900–1925: Its Foundation and the Rise of Its Difficulties. Springer
[5] 웹사이트 Walther Bothe and the Physics Institute: the Early Years of Nuclear Physics http://nobelprize.or[...]
[6] 웹사이트 The Coincidence Method http://nobelprize.or[...]
[7] 문서 Hentschel, Appendix F
[8] 웹사이트 Walther Bothe's contributions to the understanding of the wave-particle duality of light https://doi.org/10.1[...]
[9] 웹사이트 Walther Bothe Biography http://nobelprize.or[...]
[10] 웹사이트 Walther Bothe and Bruno Rossi: The birth and development of coincidence methods in cosmic-ray physics https://doi.org/10.1[...]
[11] 웹사이트 The Nobel Prize in Physics 1954 https://www.nobelpri[...] 2023-03-23
[12] 문서 Beyerchen
[13] 문서 Beyerchen
[14] 문서 Beyerchen
[15] 문서 Hentschel, Appendix F
[16] 뉴스 Das Physikalische und Radiologische Institut der Universität Heidelberg Heidelberger Neueste Nachrichten 1913-03-07
[17] 웹사이트 A History of the Kaiser Wilhelm Institute for Medical Research: 1929–1939: Walther Bothe and the Physics Institute: The Early Years of Nuclear Physics http://nobelprize.or[...] 2001-06-28
[18] 웹사이트 Rudolf Fleischmann 1.5.1903 – 3.2.2002 http://www.badw.de/p[...]
[19] 웹사이트 Wolfgang Gentner: 1906–1980 http://www.physik.un[...]
[20] 웹사이트 Hermann Dänzer: 1904–1987 http://www.physik.un[...]
[21] 서적 Heisenberg's War: The Secret History of the German Bomb Knopf
[22] 서적 Heavy water and the wartime race for nuclear energy https://books.google[...] Institute of Physics Publishing 2019-07-12
[23] 서적 Atomic Bomb Scientists: Memoirs, 1939-1945 Meckler
[24] 문서 Hentschel
[25] 서적 Surviving the Swastika: Scientific Research in Nazi Germany
[26] 서적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Quantum Theory. Volume 6. The Completion of Quantum Mechanics 1926–1941. Part 2. The Conceptual Completion and Extension of Quantum Mechanics 1932–1941. Epilogue: Aspects of the Further Development of Quantum Theory 1942–1999. Springer
[27] 서적 Heavy water and the wartime race for nuclear energy https://books.google[...] Institute of Physics Publishing 2019-07-12
[28] 문서 Hentschel
[29] 문서 Walker
[30] 웹사이트 Werner Heisenberg and the German Uranium Project / Otto Hahn and the Declarations of Mainau and Göttingen http://www.mpiwg-ber[...]
[31] 웹사이트 Max Planck Institute for Nuclear Physics http://www.innovatio[...]
[32] 문서 Hentschel, Appendix E
[33] 문서 Walker
[34] 웹사이트 Präparat 38, 38-Oxyd, and 38 http://www.deutsches[...]
[35] 문서 FIAT Reviews of German Scienc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